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누가 어떻게 운명을 결정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 아무런 까닭 없이 운명이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운명이 우연의 결과라면 일생을 어렵고 고달프게 사는 사람은 정말 억울할 것이다. 또한 정해진 규칙 없이 삶이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면 법률이나 윤리 도덕을 지킬 필요없이 요령껏 세상을 살아도 될 것이다. 법망만 피한다면 어떤 짓을 해도 괜찮을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에 의해 누리는 행복의 질이 많이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재산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과 상관 없다. 가난한 서민이라도 선행을 베풀면서 사는 사람은 삶이 평온하고 행복하다. 권력과 재산을 다 가져도 악행을 저질러 온 사람은 불안하고 어둡고 불안정하다.
'공(功)은 쌓은대로 가고 죄(罪)는 지은대로 간다.'
'선행을 많이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 積善之家必有餘慶'
'공자 왈 선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으로써 보답하고 악행을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 벌한다. 爲善者天報之以福 爲不善者天報之以禍'
'장자 왈 만일 사람이 악행을 하고도 이름을 드러내 유명해졌다면 비록 사람이 그를 해하지 않아도 하늘이 반드시 그를 벌할 것이다. 약人作不善得顯名者 人雖不害 天必戮之'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다. 하늘의 그물이 넓고 성글지만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種瓜得瓜種豆得豆 天網恢恢疎而不漏'
수 많은 속담과 옛 성인들의 어록에서도 끊임없이 선(善)을 강조하고 악(惡)을 경계했다. 이것이 단순한 도덕과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교훈일까? 아니다. 그것은 피상적이고 막연한 도덕률이 아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삶의 방법론이다. 잘 살기 위한 삶의 기술이다. 운명을 공부하다 보면, 운명의 체계를 깊이있게 공부하다 보면 옛 성인들의 말씀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선악에 대한 기준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식인(食人) 풍습은 밀림의 미개족에게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중국은 4000 년 역사에서 끊임없이 식인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한나라가 건국된 B.C 206 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서기 1912 년까지의 정사(正史)에 220 차례나 식인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환공이 사람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환공의 요리사 역아(易牙)는 자기의 어린 아들을 죽여 요리해서 바쳤다. 역사서에서 역아는 충신의 표상으로 추앙 받았다.
이슬람 율법에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므로 그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한국의 빙과류가 중동지역으로 많이 수출되는데 돼지고기에서 추출한 젤라틴 성분이 들어 있는 것이 밝혀져 중동지역으로의 수출이 중단되었다.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식용으로 하는데 아무런 부담감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특별히 나쁜 짓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여러 명의 첩을 두는 것이 법적,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지금도 일부다처가 보편화되어 있다. 그런데 히말라야 지방의 티벳이나 라다크에서는 한 여자가 두 사람의 형제와 결혼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일처다부제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그들 사회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선악의 기준에서 절대선과 절대악의 잣대는 무엇인가? 나는 행복과 고통이 그 잣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이 선이고 고통을 주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변의 다른 존재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어떻게 내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지, 다른 존재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어떻게 나를 불행하게 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현상을 기적이라고 치부하거나 또는 미신이라고 단정짓고 도외시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기적적인 일, 미신과 같은 현상들이 빈번하다.
17 세기 영국의 물리학자 뉴턴으로 대표되는 고전물리학의 입장에서는 우주는 역학적(力學的)인 법칙에 의해 정교하게 돌아가는 인과론적(因果論的) 세계라고 규정짓고 있다. 그러나 양자론(量子論)의 대두로 원자 이하의 세계가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 든 인과론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원자 이하의 미립자들은, 물리학에서 물질을 정의하는 '특정 시점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질량 x 속도)을 알 수 있는 것' 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한마디로 미립자들은 허깨비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지금의 위치가 다음 위치의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없는 유령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이 거대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기본 단위인 미립자들이 사실은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는 허깨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미립자들은 정보와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재를 확인할 수 있다. 정보와 힘은 무형이라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다만 느끼고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힘이 질량으로 바뀌면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물질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힘이 질량으로 바뀌는 것은 정보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정보는 모든 물질 입자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정보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정보는 우리의 오감(五感)으로 감지할 수 없는 파동의 세계에 존재한다. 이 정보의 세계를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장식(藏識)이라고 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의 정보 뿐만 아니라 전자가 전자일 수 있고 양자가 양자일 수 있는 정보도 아뢰야식이라는 정보의 세계 때문이다. 아뢰야식에는, 입자적인 세계에서의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없다. 아뢰야식에서는 생물과 무생물의 정보가 통합되어 일체를 이루고 있다. 아뢰야식에 의해 물질에서 생명이 발현될 수 있었고 그 생물이 진화할 수 있었다.
아뢰야식에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축적된다. 이 기억과 경험은 한 개체의 일생 동안의 경험 뿐만 아니라 수십억 년 동안 진화하면서 경험한 모든 생물체의 정보도 함께 들어있다. 이 정보의 세계가 존재하므로 해서 생물의 진화가 가능하고,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업(業)과 윤회(輪回)의 개념이 성립된다. 또한 업이나 윤회의 프로세스를 통해 우주변화의 근본 원리인 조화와 균형을 성취할 수 있고, 영적인 발전 혹은 진화가 가능해진다. 무생물에서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물로, 식물에서 동물로, 어류에서 포유류로, 포유류 중에서도 우주를 인식하고 철학과 과학을 사유하고 영혼의 존재를 짐작하는 인간의 단계로 생명은 진화했다.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고 철학과 종교가 심오해지면서 삶은 더욱 복잡해지고 감성은 더욱 예민해지고 풍부해졌다. 또한 사유의 폭은 엄청나게 확장되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추론이 가능해졌고, 깊은 명상을 통해 존재의 근원을 경험하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입자론적인 관점에서는 기적 혹은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현상들도 파동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영적인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수긍하기 시작했다. 업이나 윤회라는 개념이 비과학적인 미신이 아니라 이제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와 있다.
전생과 윤회에 관한 언급은 고대로부터 있어 왔다. 많은 종교와 철학에서 전생과 윤회에 관한 가르침을 펼쳐 왔다. 힌두교, 불교를 비롯한 모든 인도의 종교와 사상에서는 전생과 윤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초기의 유대교, 기독교에서도 윤회의 가르침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이집트, 바빌론 등에서도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고 있었다. 기독교에서 전생과 윤회의 개념을 없앤 것은 서기 335 년부터였다. 이 때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정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교리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각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윤회에 대한 언급을 삭제했고, 서기 553 년 제 2차 종교회의에서는 전생과 윤회에 대한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기독교 사상이 지배하는 서양에서는 전생과 윤회에 대한 가르침이 잊혀졌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정신의학의 발달과 최면법의 보편화로 인해서 전생과 윤회에 대한 임상사례가 많이 발표되고 있고, 새롭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모리 번스타인이 쓴 '브라이디 머피를 찾아서' 라는 책에, 저자가 전생으로 퇴행시킨 어떤 여자의 전생을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그녀의 전생에서 경험한 지역과 사람과 사건들이 매우 정확했다. 지역은 자신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외국이었고, 시기도 100 년 전 상황이었는데도 아주 상세하게 기억해 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이안 스티븐슨의 책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에도 전생에 관한 사례들이 구체적으로 나와있다. 니스 켈시의 '많은 생애들', 헬렌 웜바크의 '전생을 다시 살다', 에디스 피오레 '당신은 여기 온 적이 있다', 모리스 네더튼 '전생치료', 조엘 휘튼 '삶 사이의 삶', 브라이언 와이스 '나는 전생을 믿지 않았다' 등 많은 서양의 정신과 의사들과 의학자들이 전생과 윤회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이제는 서양에서도 전생과 윤회라는 개념이 보편화 되어 있다.
기독교 사상이 지배하는 현대 서양의 많은 소설, 드라마, 영화 등에는 전생(former life, before life)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서양사람들도 전생을 인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들의 종교는 전생을 부정하는 교리로 되어 있지만 그들의 잠재의식은 전생이 있고 인간은 윤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일상에 전생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결정론적인 운명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전생과 윤회라는 개념이 전제되지 않으면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다. 수 많은 전생의 업(業)의 집적(集積)이 지금의 나의 운명이다. 업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다. 운명이라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는 과정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에게 고통을 주었다면 반드시 그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운명이다. 누군가의 소유물을 빼앗았다면 운명을 통해 갚게 만든다. 누군가를 기쁘게 행복하게 했다면 운명을 통해 기쁨과 행복을 보상 받는다. 나의 소유물을 누군가에게 줬다면 운명은 반드시 되돌려 준다. 따라서 운명은 내가 만든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만드는 운명은 차생(次生)의 것이다. 이번 생의 운명은 수 많은 전생을 통해 결정되어 있어 바꿀 수 없다.
결정되어 있는 운명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틈이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결정되어 있는 운명에 끌려가는 피동적인 삶이라면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운명에서 한 발짝도 비켜 설 수 없다면 우리가 존재할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전생과 윤회와 업의 개념을 받아들이면 내 운명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전생의 업의 결과가 지금 나의 운명이고 이번 생의 업의 결과가 다음 생의 운명이 된다. 지금 내가 누리는 복(福)을 주변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면 다음 생에서 행운이 되어 돌아온다. 지금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고 기쁘게 해준다면 다음 생에서 그들이 나를 행복하고 기쁘게 해줄 것이다. 이번 생의 선업(善業)과 적덕(積德)이 다음 생의 복으로 반드시 귀결된다. 이것은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의 빈틈도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래서 옛 성인들의 말씀이 막연한 도덕률이 아니라 우리가 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혜안(慧眼)을 가지고, 삶의 전과정을 통찰해서 얻은 지혜로운 결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결코 피상적인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주변을 행복하게 기쁘게 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주팔자 여덟 글자는 운명의 코드이고 업에 관한 부호이다. 이 여덟 글자를 잘 해석하면 이번 생에 겪게 될 운명의 전개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전생의 업에 대한 책임과 보상이 어떻게 전개되는 지를 파악할 수 있어, 이번 생에 당면한 목표나 과제를 추론할 수 있다. 즉 이렇게 살고 있는 이 삶이 내게 어떤 의미,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지를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사주명리학은 단순하게 길흉화복을 점치는 학문이 아니다.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라는 삶의 좌표를 제시해 주는 학문이다. 운명이라는 표면적인 현상 너머에 있는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론이다.
'운명을 말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불행과 고통 (0) | 2010.09.05 |
---|---|
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0) | 2010.09.03 |
3. 결정되어 있는 운명 (0) | 2010.08.29 |
2. 운칠기삼(運七技三) (0) | 2010.08.27 |
1. 운명을 말한다 (0) | 2010.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