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말한다

1. 운명을 말한다

금린학당 2010. 8. 24. 11:37

            1. 운명을 말한다.

 

 

     1970 년대 중반 한국인 30 여명이 탄 2만 톤 급 화물선 'P' 호가 호주에서 철광석을 싣고 한국의 포항제철로 향하고 있었다. 'P' 호는 유태계 미국인이 운영하는 'L' 해운 소속이었다. 이 회사는 선원들에 대한 대우가 짜기로 유명했는데, 'P' 호가 호주에서 철광석을 싣고 있던 그때 같은 항구에 입항한 같은 회사 소속의 'Q' 호가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선원들은 1 년에 2 개월 정도 연가(年暇)를 받을 수 있었다. 마침 'Q' 호에는 연가가 임박한 선원이 몇사람 있었다. 회사에서는 비행기 요금 등을 아끼기 위해 그 선원들을 'P' 호로 발령을 내고 같은 직책의 'P' 호 선원들을 'Q' 호로 옮기게 했다. 또 'Q'호의 선원들 중 7, 8 개월 정도 근무한 선원들도 희망하면 연가를 받을 수 있게 해서 'P' 호로 옮겨 탈수 있었다. 어떤 선원의 경우 'Q' 호에 근무한지 6 개월 정도 됐는데도 연가 신청을 해서 'P' 호로 옮겨 탔다. 회사에서는 그 항차(航次) 한국으로 가는 'P' 호에 되도록이면 많은 연가자들을 태우려고 했다. 연가자들이 미국이나 유럽 남미 등에서 하선하면 연가자와 교대자의 비행기삯과 호텔 이용료 등 비용이 만만찮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거의 반에 가까운 15 명 정도의 선원이 교체되었다.

     가족을 떠나 망망대해를 떠돌며 외국의 낯선 항구를 찾아 다녀야 하는 선원들의 입장에서는 입항지가 한국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기쁜 일이었다. 더구나 연가를 받아 2 개월 정도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된 선원들의 경우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호주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던 'P' 호가 남태평양의 어느 해역에서 거대한 태풍을 만나 그만 침몰하고 말았다.30 여명의 선원들은 수중 고혼(孤魂)이 되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었다. 'Q' 호에서 'P' 호로 옮겨온 선원들 특히 연가 기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연가를 신청해 'P' 호로 옮겨 탄 선원들이 더욱 안타깝다. 반대로 'P' 호에 있다가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Q' 호로 옮겨간 선원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야구 감독 김성근씨는 징크스에 민감하다고 한다. 2010 년 4 월 14 일 어떻게 하다 보니 면도를 하지 않고 시합장에 갔는데 그날 경기에서 이겼다. 다음 날도 면도를 안 하고 시합에 임했는데 또 이겼다. 수염이 승리를 만드는 징크스라고 생각한 그는 20 일 정도 면도를 하지 않고 시합장에 나갔는데 15 연승을 했다.

     김성근 감독은 일상의 사소한 일들도 승부와 관련지어 생각한다고 한다. 양말도 '재수있는 양말' 과 '재수없는 양말' 로 구분해서 신고, 어느 날 몸이 안 좋아 진통제를 먹고 시합에 나갔는데 승리를 하자 다음부터는 몸이 멀쩡한데도 진통제를 먹고 경기를 했다고 한다. 삼각김밥을 먹었는데 승리를 하게 되면 계속해서 삼각김밥을 먹고, 시합 도중 화장실을 다녀와서 지게 되면 다음부터는 아무리 급해도 시합 끝날 때까지 화장실을 안갔다.

 

     정형외과 전문의 'A' 씨는 아주 목이 좋은 자리에 상당한 규모의 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침에 문을 열자마자 환자들이 몰려와서 저녁에 끝날 때까지 환자들로 바글거렸다 두 명의 의사를 고용했고 십 여명의 직원들도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수술 환자도 많았고 입원실도 가득 찼다. 제법 많은 재산을 모은 'A' 씨는 욕심이 생겼다. 중간 규모의 종합병원을 운영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친한 후배와 동업으로 약간 변두리 지역에다 종합병원을 개설했다. 자금이 많이 소요되어 두 사람의 전 재산을 투입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투자자를 모집하고 은행대출을 받고 해서 보충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운영이 잘 되지 않았다. 환자들이 생각만큼 와주지 않았다. 빚이 눈덩이 처럼 불어났다. 2 년 정도 악전고투  했으나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다. 가족들과 함께 길거리에 나앉게 됐는데 형제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셋집은 하나 구할 수 있었다.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동업하던 후배로부터 형사고발을 당했다. 병원장을 맡았던 그를 횡령, 업무상 배임, 사기 등의 죄목으로 고발했다. 병원 경영이 어려워 여러가지 편법을 동원해야만 했던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아 결국 교도소에 들어갔다. 면허만 있어도 최소한 중산층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의사가 재산을 전부 날리고 돈 문제 때문에 교도소에 들어갔다.

 

     B 씨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장교로 근무하다 대령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 그는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M' 해운에 취업해서 주로 유조선에 승선했다. 유조선의 항해사를 거쳐 선장이 되었다. 군인 기질이 강하게 남아있던 그는 선원들에게 깐깐한 인상을 주는 선장이었다. 원리원칙주의자였고, 군대와 같은 엄한 규율을 요구하는 그를 선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선원들에게는 인기없는 선장이었다.

     1983 년 8 월 말 B 씨가 승선한 배가 뉴욕에 입항하였고, 마침 B 선장은 연가를 받게되어 교대자와 업무 인수 인계를 하고 하선하게 되었다. 같이 연가를받은 항해사, 기관사, 일반 선원 등 5 명과 하선해서 뉴욕의 케네디공항으로 향했다. 그들이 탈 비행기는 KAL007 기였다.

      케네디공항에 도착한 B 씨는 갑자기 뉴욕에서 공부중인 딸이 보고싶었다. 전날 호텔에서 하루 묵는 동안 딸을 만나보았고 딸에게 용돈도 두둑하게 쥐어주고 왔는데, 공항에서 불현듯 다시 딸이 보고싶어졌다. 그는 수속을 담당한는 에이전트에게 오늘 귀국을 미루고 다음 날로 일정을 잡아 달라고 했다. 에이전트는 본사와 상의를 했고 간부급 선원의 부탁을 무시할 수 없었던 본사에서는 선장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다섯 명의 다른 연가자들은 KAL007 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고 B 씨는 딸이 살고 있는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B 씨가 탈 예정이었던 KAL007 기는 무슨 이유에선지 소련 영공을 침범해서 비행하다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에 격추되고 말았다.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과 승무원 269 명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 비행기를 타기 직전 억지처럼 그 비행기를 타지 않았던 그만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 이후로 B 씨는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부드럽고 자상하며 항상 고맙다는 말을 자주 했다.

 

     1980 년 미국의 공화당 대선 후보 레이건의 아내 낸시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점성술사 조운 퀴클리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의 운을 물었다. 퀴클리는 '레이건이 승리해서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된다' 고 했다. 그 후로 낸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퀴클리와 의논했다. 1985 년 11 월 19 일 제네바에서 레이건과 소련의 새 지도자 고르바초프와의 미.소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날짜도 퀴클리가 잡았다. 낸시는 늘 대통령의 석 달치 일정표를 퀴클리에게 보내고 퀴클리는 길일, 흉일 등을 선별해서 알려주었다.

     북한 김정일의 아내 고영희( 2000 년 사망 )는 평소에 점보는 것을 좋아해 역술 등에 관심이 많았다. 주변에 '신통력'을 가진사람들을 다수 두고 매사를 의논했다고 한다. 그들의 조언에 따라 막내 아들 김정운(金正雲)의 이름을 김정은(金正恩)으로 바꿨다. 개명(改名) 덕인지 몰라도 김정일의 후계자로 김정은이 대두되고 있다.

     국회에서 답변하던 나까소네 일본 총리가 잠시 쉬는 틈을 타 수첩을 꺼내 펼쳐 보았다. 사진기자들이 줌 렌즈로 수첩의 내용을 당겨 찍었는데 거기에는 나까손네의 그날 운세가 적혀 있었다.

     처칠과 드골도 점성술사의 조언을 들었고 스탈린도 히틀러와 전쟁을 치르면서 점술가의 도움을 받았다.물론 히틀러도 주변에 몇명의 점술가를 두었다.

 

     C 씨는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고 아내 D 씨는 강원도 홍천의 고등학교에서 불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부부교사인 이들은 주말이 되면 교대로 한 주일은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 오고 다음 주일은 남편이 아내와 아들이 있는 강원도로 내려가곤 했다. 대학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서울로 남편을 보러 온 어느 주말, 사소한 말다툼 때문에 서로 마음이 상한 채 헤어졌다. 다음 주일은 남편이 강원도로 내려 올 차례였는데 저번 주일의 말다툼 때문에 삐쳐있던 남편이 안내려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아내는 남편을 달래고 화해하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1990년 9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 40분,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내와 아들이 탄 강원여객 서울행 직행버스가 과속으로 빗길을 달리다가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62 킬로미터 지점의 섬강교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탑승객 28명 중 24명이 사망했다. C의 아내와 아들은 강물 속에서 실종되어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강물 속에서 헤엄쳐 살아  나온 아내는 아들을 찾아 다시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C는 강변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며칠 밤을 새면서 아내와 아들을 기다렸다. 사고 5 일 후 아내의 주검이 발견되었고, 10 여일 후 아들의 시신도 찾았다.

     C는 며칠 동안 강가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9 월 15 일 새벽 강둑의 전주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妻子)를 버리고, 이제는 처자를 부여안기 위해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고생만 하   

 .   던 고마운 아내! 아들의 뒤를 따라 다시 강으로 뛰어 들어갔다는 아내처럼 저도 처자를 따라 떠나려 합니다.

      부디 처자를 따라간 저의 죽음을 애통해 하지 말 것을 당부드리며, 저희 세 식구 하늘나라에서의 다시는 헤어짐이 없는 만남과 행복을 기

     원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아내와 아이가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항상 헌신적이고 겸손하며 빈곤한 저를 풍요롭게 하던 가없

     이 고운 아내와 아들이 저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

     당시 33세의 C씨가 남긴 유서 내용이다.

     그 주말은 C가 홍천으로 가야 되는 차례인데 운명의 장난으로 아내와 아들이 서울 가는 직행버스를 타게 되었다. 그때 아들은 서울 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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