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겪는 불행 중 인연으로 인한 고통은 매우 다양하고 심각하다. 부부간의 불화와 이별, 연인과의 이별, 자식을 잃은 슬픔,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 형제간의 불화 등 사람으로 인한 아픔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D씨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여자였다. 아들을 그냥 보고만있어도 좋았다. 아들은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으며 공부도 잘했다. 의사가 꿈이었던 아들은 재수 끝에 의대에 합격했다. 재수를 하는 일 년 동안 맘 졸이며 아들을 뒷바라지 해 온 엄마는 아들의 합격 소식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아들이 정말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들의 팔짱을 끼고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러 다녔다.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내 아들이라고, 얼마나 멋있느냐고 자랑하고 싶었다.
합격 통지를 받은 후, 아들은 입시 공부 때문에 축이 난 체력을 보강한다며 헬스클럽을 다니고 있었다. 계란 흰자, 닭 가슴살, 근육을 키우는 보조식품 등을 찾아서 먹으며 열심히 운동을 했다. 근육도 제법 불어나고 체중도 늘었다. 엄마 앞에서 윗통을 벗고 근육 자랑도 했다.
대학 입학을 며칠 앞 둔 어느 날 저녁, 헬스클럽에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 운동 도중 쓰러졌다는 것이다. 119 응급구조대가 와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으니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많이 놀라긴 했지만 운동 도중 약간 부상을 입은 것으로 생각하고 남편과 함께 헬스클럽에서 일러 준 병원으로 갔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급하게 아들의 보호자를 찾고 있었다. 병원 관계자를 만나자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된다고 했다. 심장마비로 위험한 상태라고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머리 속이 하얘지며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수술을 했지만 끝내 아들은 깨어나지 못했다. 다음 날 새벽녘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엄마는 살 수가 없었다. 몇번을 까무러졌다. 혼절했다가 깨어날 때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꿈처럼 느껴져, 자신이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현실이었다. 다시 몸부림치며 울부짖다가 까무러졌다.
아들을 떠나 보내고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폐인처럼 일 년 가까이를 누워 지냈다. 하루라도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누구의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다. 아들을 따라 죽고만 싶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슬프고 억울했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반 강제적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인처럼 되어 있는 그녀를 억지로 씻기고 음식을 해 먹였다. 친구를 보고 그녀는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일을 당해야 하니. 불쌍한 내새끼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사그러져야만 했나. 내가 그렇게 죄가 많았을까. 신(神)이 있으면 한 번 따져보고 싶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뭘 잘못했는데 생 때 같은 내새끼를 먼저 데려가느냐고, 내가 죽어서라도 가서 한 번 묻고 싶다."
참척(慘慽)의 고통은 정말 예리하고 질겼다. 그녀는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친구도 그녀를 붙잡고 같이 울었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얘기했다.
"이제 그만 해라. 그만큼 했으면 됐다. 너라고 왜 그런 일 안 당하겠니. 이 세상에 자식 먼저 보낸 부모가 어디 한 둘이니. 자식 앞 세운 부모 많다. 너 혼자만 자식 먼저 보낸 거 아니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너만 어떻게 예외가 될 수 있겠니. 너만 어떻게 특별할 수 있겠니."
친구의 말이 비수처럼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그녀는 친구에게, 당장 나가라고,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지라고,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고 악다구니 하며 내좇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의 말이 가슴에 맴돌며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불행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지. 내가 뭐가 특별하다고 내게만 불행이 비켜갈 수 있겠나. 가슴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인도 구시라 성의 젊은 과부가, 죽을 병에 걸린 외아들을 살려달라고 부처님을 찾아가 애원했다. 부처님은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다고 했다. 그 여인은 부처님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다.
부처님이 말했다.
"지금 동네로 나가서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을 찾아라. 그 집의 쌀을 한 줌 얻어다 죽을 끓여 먹이면 그대의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희망을 가진 여인은 아이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온 성을 돌면서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이 집이 혹시 죽은 사람이 없는 집입니까?'
하루 종일 헤매고 다녔지만 그런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낙심해서 부처님을 찾아와 말했다.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은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말했다.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인연 따라 일어나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라."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는 유행가 가사처럼 고통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성장시킨다.
인기가수 D양은 수년 전 자신의 사생활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 연예인 생활을 접어야 하는 고통에 직면했다. 남자친구와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을 촬영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어 많은 사람들이 포르노를 감상하듯 그 동영상을 보고 낄낄거렸다. 유교적인 관습이 강하게 남아있는 한국 사회에서, 결혼도 안 한 유명 연예인, 그것도 여자 연예인의 성적인 일상이 적나라하게 공개되어버린 것이다. 그 일은 사회적인 반향이 엄청나서 외신에서도 다룰 정도였다. 그녀의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수치심과 배신감 때문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몇년을 고통의 질곡 속에 갖혀있던 그녀는 재기를 시도했다. 재기한 그녀의 목소리는 달라져 있었다. 깊은 한과 슬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는 깊이가 느껴졌다.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에 환호했다. 그녀는 다시 톱가수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우리에게 고통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고통은 우리를 정화하고 우리의 의식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고통을 겪어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누어 지려 한다. 고통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옛날 보릿고개 얘기를 하며 그 당시 배고팠던 고통을 얘기하면 요즘 아이들은, '밥이 없으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지.' 라고 한다고 한다. 또 '다이어트 되고 좋겠네' 라고 한다.
조선시대 영조 임금은, 죄인들을 문초할 때 불에 달군 인두로 사람을 지지는 단근질을 금했다. 자신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100여 장의 뜸을 뜬 후, 불로 살을 지지는 고통을 체험해 봤기 때문이다. 그런 극단적인 고통을 겪어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고통을 겪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아름답다. 이중섭이나 박수근 같은 화가들은 한결같이 불우했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던 시절은 매일 매일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들을 고통 속에 몰아 넣은 가난, 이별, 그리움이 절절이 그림 속에 녹아 있다. 사람들은 그 고통의 흔적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보기아스가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30 년은 테러, 살인, 전쟁 등 유혈이 낭자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시절에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두각을 나타내었고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했다. 스위스는 별다른 굴곡 없이 5백 년 동안 평화와 안정을 누렸지만, 스위스인들이 만들어 낸 것은 뻐꾸기 시계가 전부다.'
'제3의 인간' 이라는 책에서 그레이엄 그린이 한 얘기다. 고통과 불행은 부정적인 작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도 반드시 함께 갖추고 있다.
동양의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유체계에는 음양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양 속에는 반드시 음이 내포되어 있고 음 속에는 양이 들어 있다. 독립된 양이나 음은 절대 존재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갑목(甲木)은 양 중의 양목이지만 음 중의 음토(陰土)인 기토(己土)와 합을 해서 작용한다. 음양은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음이 있어야 양을 인식할 수 있고, 양이 있어야 음을 인식할 수 있다. 밝음은 어둠이 있어야 인식이 가능하고, 어둠 역시 밝음이 있어야 개념이 성립된다. 밝기만 하면 밝음을 알아차릴 수 없고 어둠이 있어야 밝음을 알 수 있다. 어둠 역시 밝음이 있어야 어둠을 알아차릴 수 있다.
가난, 병, 아픔, 구속, 이별, 죽음, 부패, 폭력, 전쟁, 기아, 공포 등 부정적인 상황이 있어야 부유, 건강, 쾌락, 자유, 상봉, 탄생, 신선, 화해, 평화, 풍요, 안정 등 긍정적인 상황이 인식된다. 음과 양은 서로 보완적 관계이므로 어느 한 쪽이 배제될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긍정적 상황, 즉 양(陽)에 치우친다. 양만 선호하고 양만 추구한다. 좋은 것, 착한 것, 올바른 것, 완벽한 것, 건강한 것, 아름다운 것, 밝은 것 등만 추구한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것들이 절대 홀로 존재할 수가 없다. 반드시 반대되는 부정적인 것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양식 많은 집에는 자식이 귀하고 有粟無人食
아들 많은 집에는 양식이 모자란다. 多男必浚愚
재주 있는 자는 그 재주 펼 길 없으며 才者無所施
복을 다 갖춘 집 드물고 家室少完福
큰 도는 늘 하찮은 대우를 받는다. 至道常陵遲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이 탕진하고 翁嗇子每蕩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어리석다. 婦慧郞必癡
보름달 뜨면 구름이 자주 가리고 月滿頻値雲
꽃이 만발하면 바람이 불어댄다. 花開風誤之
세상 일이란 모두 이런 것 物物盡如此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무도 모르리 獨笑無人知
다산(茶山) 정약용의 '홀로 웃다(獨笑)' 라는 시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적당히 고통으로 간을 맞추어야 세상을 맛있게 살 수 있다. 그런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에 다산은 홀로 웃었을 것이다.
한(漢) 무제(武帝)에 의해 생식기를 거세하는 궁형(宮刑)을 당한 사마천(司馬遷)은 죽음과 같은 고통을 이겨내고 '사기(史記)' 를 썼다. 거세당한 사마천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주나라의 문왕은 갇혀 있었기 때문에 주역을 해석할 수 있었고, 공자는 불우했기 때문에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도망다니는 신세가 됐기에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여불위는 좌천되었기에 여씨춘추를 전했으며, 시 300 편은 대부분 성현들이 고난 속에서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 전 400 년 대에 30 년간 계속되었다. 이 전쟁에 관한 기록을 남긴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장군이었다. 그런데 암피폴리스 방어전에서 패해서 추방을 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치욕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세상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어, 역사를 움직이는 강한 힘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훌륭한 역사서를 집필할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반정부 음모 때문에 고초를 겪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간질병을 앓았고 사형수의 고통도 겪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고통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었다.
음(陰) 속에는 반드시 양(陽)이 자리 잡고 있어 언젠가 양이 표출하는 시기가 온다. 그래서 옛 성인들은 너무 양을 추구하지도, 너무 음을 배제하지도 말라고 했다. 양을 추구하고 음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세상은 시끄러워지고, 갈등이 생기고, 인생살이가 힘들어진다. 행복과 불행은 늘 같이 있다. 음양이 같이 있듯이.
'운명을 말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관운(官運)을 만드는 재운 (0) | 2010.09.13 |
---|---|
9. 재운(財運) ㅡ 세속적 행복 (0) | 2010.09.12 |
7. 장애인 (0) | 2010.09.07 |
6. 불행과 고통 (0) | 2010.09.05 |
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0) | 2010.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