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반여사(新考槃餘事)

에필로그

금린학당 2012. 9. 2. 12:51

     습기와 폭염으로 마치 한증막과 같은 여름을 보냈고, 그 여름의 끝자락에 두 개의 태풍이 몰려와 깊은 상처를 남겼다. 볼라벤과 덴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태풍이었다. 볼라벤은  라오스에서 명명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고원' 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덴빈은 일본에서 명명했는데, 별자리 이름으로 '천칭' 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예쁜 이름들이었는데 파괴력은 엄청났다. 바람으로 닥치는대로 찢어놓고 비를 퍼부어 걸리는대로 쓸어버렸다. 집도 부수고 거대한 화물선도 두 동강 내고 도시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수십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태풍의 중심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우리 동네도 바람은 온종일 지독하게 불어댔다. 바닷물이 안개처럼 비산(飛散)해서 나무의 푸른 잎들을 까맣게 태웠다. 마당의 꽃들이 소금물에 젖어 잎이 떨어지고 생기를 잃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갑자기 가을이 찾아왔다. 바람이 서늘하고 달빛이 맑아졌다.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 위로 삽량한 바람이 불고 교교한 달빛이 젖어든다. 세월이 지나면 상처는 아문다. 새살이 차오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이 회복된다. 세월이 약이다.

     10년쯤 전에 내 서재를 드나들던 학인 한 사람이 오랜 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혹시 할아버지가 되신 건 아닌지...., 세월이 빨리도 흘렀네요'

     애들이 결혼을 안 해 아직 할아버지는 안 됐지만 세월은 에누리 없이 흘러 살쩍이 희게 변하고 있다. 당시 30대 중반의 앳된 새댁이었던 그 학인도 이제는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찾아오고, 세월은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세월따라 우리의 모습도 변하고 우리의 인연도 바뀌고 바뀔 것이다. 태풍이 휩쓸고 간 마당에 하얀 나도샤프란 꽃들이 무성하게 꽃대를 내밀어 만발해 있다.  마당을 치우고 잔디를 깎고 시든 가지를 잘라내고 쓰러진 꽃들을 일으켜 세웠다. 말없이...

 

 

그래

세월이 참 빨리도 흘렀지

그리고 세월은 그대로 빨리 흐르겠지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조금씩 부서져 내려

그 추억의 길도

그 달빛도

무화(無化)의 아득함으로 잦아들겠지

거기 한 자락 슬픔이 남을까

온 몸의 피가

모두 아린 눈물로 바뀔까

어제 왼쪽으로만 돌던 아린 눈물이

오늘은 오른쪽으로도 스며든다

몸이 아린 만큼 영혼이 가벼워질까

해 저물고

가던 길 멈추고 돌아선다

모두가 낯선 길

어느 길인들 어떠랴 혼자 걷는 길

이제는 불을 끄고 문을 닫을 시간

빗장을 건다

'신고반여사(新考槃餘事)'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갯마을의 저녁식탁  (0) 2013.01.28
폐선(廢船)  (0) 2012.11.12
세한도  (0) 2012.07.18
풍란과 수국이 꽃을 피우다  (0) 2012.07.01
꽃이 지다  (0) 2012.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