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반여사(新考槃餘事)

2. 매화(梅花)

금린학당 2011. 1. 3. 23:47

     마루에 들여놓은 매화가 꽃을 활짝 피웠다. 보름쯤 전부터 한 두 송이씩 순백의 꽃잎을 열더니 지금은 200여개의 꽃망울들이 거의 전부 개화했다. 은은한 매화 향이 집안에 가득하다. 1월 1일에 맞춰 8할 이상 개화를 계획하고 가꾸었는데, 꽃이 잘 피었다.

     매화는 지조와 청빈(淸貧)의 삶을 살아가는 선비를 상징하는 꽃이다.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고 백합이 기독교의 상징이라면 매화는 유교의 상징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얼음 속에서,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모습이 강직하고 곧은 절개를 지키는 선비를 닮아있다. 소박한 모습은 청빈을, 맑은 향은 고고함을 의미한다.

 

     퇴계 이황은 매화를 유별나게 좋아했다. 매화에 관한 시도 90여 수를 남겼다. 그는 생전에 '매화시첩(梅花詩帖)' 이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다. 자신을 '진지매자(眞知梅者)', 즉 '참으로 매화를 아는 사람' 이라고 칭했다.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쫓아오네                    步履中庭月진人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梅邊行繞幾回巡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夜深坐久渾忘起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 그림자 몸에 닿네                 香滿衣巾影滿身

 

     매화를 정말 좋아했던 이황이 남긴 시 중 하나이다.

     추운 섣달에  세상을 떠난 퇴계는 마지막 유언이 '분매(盆梅)에 물 주는 것 잊지마라' 였다. 죽으면서도 매화를 걱정했다.

 

     매화의 원산지는 중국 사천성 등지로 알려져 있다. 2,000년 전 중국의 의학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에 매실(梅實)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실제로는 3,000년 전부터 매실이 약용이나 식용으로 사용되었던 흔적이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이 되고 있다. 매실을 약재로 쓸 경우 짚불연기를 쐬어서 법제한 오매(烏梅)를 쓴다. 일본에서는 매화를 '우메' 라고 하는데 매실을 약용으로 법제한 '오매' 에서 비롯한 명칭이다.

     매실이 다 익기 전 청매(靑梅)일 때 따서 술을 담그거나 설탕에 절여 효소를 만들면 좋은 건강음료가 된다. 청매는 강한 살균 작용이 있다. 세균성 장염이나 설사병에는 즉효를 보인다. 일전에 바깥에서 음식을 잘못 먹어 탈이 난 적이 있었다. 밤중에 배꼽 근처가 끊어질 듯 아픈데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갈 형편이었다. 매실 생각이 나서 따뜻한 물에 매실 효소를 진하게 타 한잔 마셨더니 5분도 안되어 통증이 가라앉았다. 그만큼 매실의 효과가 뛰어나다.

     일본에서는 '우메보시' 라는 매실 장아찌를 즐겨 먹는다. 차조기 잎으로 붉게 물을 들여서 먹는데, 주로 도시락 반찬에 많이 쓰인다. 도시락은 쉽게 상할 염려가 있는데, 도시락을 먹으면서 우메보시 몇 조각을 먹게 되면 식중독을 예방할 수 있다.

     매화는 일본을 통해 서양에 알려졌는데 그래서 명칭도 '일본 살구(Japaness apricot)' 라고 한다.

 

     매화를 호문목(好文木)이라고도 하는데, 진(晋)나라 무제(武帝)가 어릴 때 책을 열심히 읽으면 매화꽃이 만발하고 책 읽기를 게을리하면 매화꽃이 다 떨어졌다는 고사에 연유한 이름이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선향(線香) 중 '호문목' 이라는  이름의 향이 있다. 매화는 문(文)을 상징했다. 매화촌(梅花村)이라고 하면 단순히 매화 나무가 많은 동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에 높은 학문을 성취한 선비가 살고 있다는 뜻이다.

     매화는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 즉 추운 겨울을 함께하는 벗이었고,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四君子)의 반열에 올라 있다. 매화는 시, 그림, 도자기, 공예품의 좋은 소재가 되었고 열매는 실용적인 약재와 음료로 가공되었다.

 

     다완(茶碗)에 말차(抹茶)를 거품 내고 그 위에 매화꽃 한 송이를 띄우면, 연두색 찻물에 흰 매화꽃의 자태가 더욱 선명해진다. 차향과 매화향이 어우러져, 그 색과 향이 아까워 마시기를 주저하게 된다. 6월쯤 매실이 굵어지면 우리집에서는 매실주를 담근다. 매실을 씻어 대소쿠리에 담아 물을 빼는데, 황갈색 대소쿠리에 연두색 매실을 그득 담아 마루에 올려 둔다. 시골의 작은 한옥 나무 마루에 매실이 가득 담긴 대소쿠리가 놓여 있다. 나는 그 광경을 오랫동안 보고 서 있는다.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물을 다 뺀 매실을 독에 넣고 소주를 붓는다. 밀봉해서 100일간 두었다가 매실을 건져내고 다시 밀봉하여 5년쯤 숙성시킨다. 매화는 꽃도 향기롭지만 열매도 매우 향기롭다. 옛날에 현산(玄山)이 우리집에 처음 왔는데 잘 숙성된 매실주를 내 놓았더니 정말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매향(梅香)에 취해 자신의 콧수염에다 매실주를 바르기도 했다. 그와 함께 밤새도록 보이차를 안주 삼아 매실주를 마시기도 했다.

 

     동장군의 기습으로 바깥은 꽁꽁 얼어 있는데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매화는 만발해있다. 나의 마루에는 벌써 봄이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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