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오후
오랜만에 비가 제법 많이 내린다. 장마 전선이 중부 지방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바닷가에 집이 있어 여름에는 많이 시원한 편인데, 오늘은 약간 춥게 느껴진다. 열었던 방문을 닫고 유리창 너머로 비오는 바다를 바라본다.
커피를 마시며 줄리에 런던(Julie London)의 노래를 듣는다. 어쿠스틱 반주에 맞춰 부르는 저음의 재즈가 부드러운 솜털처럼 방 안에 가득하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촉촉하게 가라앉아 있고, 마치 라이브로 듣는 듯한 저음의 여가수 노래로 나는 편안한 침잠(沈潛)을 경험한다. 내 서재에 있는 오디오는 수제(手製) 진공관 엠프와 수제 스피커, 중국산 씨디플레이어로 구성되어 있다. 각 기기를 연결하는 케이블은 전문가들이 쓰는 고급품이다.
진공관 엠프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소리를 만들어 준다. 스피커는 목공예하는 고창용 선생이 만들었는데 심플한 외양에 나뭇결 무늬가 선명하다. 진공관 엠프의 파워를 절묘하게 받아 깊이 있는 소리를 표현한다. 지금의 나로서는 탄노이 스피커가 부럽지 않다.
재즈는 우리 국악의 산조(散調)처럼 즉흥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정형화되어 있는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감성을 표현한다. 연주자들이 서로 대화하듯이 즉흥적인 연주를 주고 받는다. 재즈는 파격을 추구한다. 화음도 불규칙하고 멜로디와 박자의 변화도 다양해서 예측하기 힘들다. 반복되는 장식음으로 이어지는 변주, 적당한 애드립의 조화로 연출되는 즉흥의 묘미 등이 재즈의 매력이다. 이런 재즈를 듣는데는 진공관 엠프가 최고인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줄리에 런던의 앨범에 'SWAY' 라는 노래가 있다. 흥겨운 차차차 리듬의 노래인데, 편곡을 해서 리듬이 조금 느리다. 룸바를 추기에 적당한 곡이다. 현란한 몸짓의 룸바를 추는 상상을 하며 웃는다. 잘 추지는 못해도 4, 5년 댄스스포츠 운동을 해 왔던 터라 루틴(routine)에 따라 제법 고난도의 룸바 동작을 구사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내가 출강하는 학교들이 모두 종강했고 성적 처리도 모두 끝났다. 여름 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동의과학대 학생들, 산만한 수업 태도 때문에 수업 시간마다 혼나던 녀석들이 시험은 의외로 모두 잘 쳤다. 눈물이 찔끔찔끔 나도록 혼이 났던 녀석들이 개의치 않고 마치 초등학생들처럼 팔에 매달리고 품에 안긴다. 방학하면 우리집에 놀러 오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영산대 수업은 6월 16일, 17일 끝났다. 16일은 주간반과 야간반이 모두 종강했다. 그날은 노래방을 '두 탕' 을 뛰었다. 즐겁게 점심 식사를 하고 소주도 한 잔씩 하고 노래방에도 거의 전원이 참석했다. 양정모 교장선생님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분들이 가수 수준의 노래 솜씨를 보이며 흥겨워 했다. 김월자 여사님도 노래를 두 곡이나 불렀다.
김월자 여사님은 소박하고 푸근한 큰누님같은 정을 내게 보이신다. 가을에는 손수 농사 지은 찹쌀과 모과를 선물하고 이번에는 엄청 씨알이 굵은 마늘을 한 접이나 내 차에 실어 주신다. 스승의 날에는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금일봉을 내 주머니에 찔러 넣어 준다. 부족한 선생을 믿고 따라주는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야간반도 그날 저녁식사를 하고 노래방에서 여흥을 즐겼다. 명리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노래를 잘 하게 되어 있는지 차원이 다른 솜씨들을 보여줬다. 그날은 자정이 넘어서 집에 들어왔다. 좋은 분들을 가르치고 있어 나는 행복하다. 최선을 다 하리라 다짐도 한다.
마당의 시든 꽃대도 잘라내고 손바닥만한 잔디밭도 잔디를 깍고 정리를 했다.
이렇게 비가 오는 오후엔 게으름 피우며 노는 재미도 있다. 낙숫물 소리도 듣고 빗방울에 젖고 있는 꽃잎도 무연히 바라본다. 요즘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려운 종교 관련 책들을 읽고 있는데, 이런 날은 그런 책들은 집어 던지고 한가하고 무료함을 즐긴다. '무무거사' 에 대한 반응들이 좋은 것 같아 소설을 한 편 더 써볼까 하고 구상하고 있다. 좀 길고 메시지가 많이 담길 내용이 될 것 같다.
꽃잎이 비에 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