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반여사(新考槃餘事)

무무(撫無)거사

금린학당 2011. 5. 14. 23:52

     그는 호를 무무(撫無)라 했다. 그의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성이 김씨라는 것은 얼핏 들었던 것 같다. 나와 같은 김해 김씨 삼현파(三賢派)여서 서로 항렬을 따져 본 기억이 있다. 이 글에서 그에 대한 호칭을 무무선생, 무무거사 두 가지를 두고 망설이다 무무거사로 하기로 결정했다. 거사(居士)는 불교에서 재가(在家) 수행자를 일컫는 말인데, 그는 정식으로 출가한 승려가 아니고 불교라는 틀에 매여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다. 불교 교리에 통달한 사람도 아니었고 절에 열심히 다니면서 기도를 하거나 참선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어쩐지 선생이라는 호칭보다 거사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아 무무거사(撫無居士)로 부르기로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여러 해 전 어느 초여름 해질녘이었던 것 같다. 그때 우리집 울타리에 인동초 꽃이 만발하여 그 달콤한 향기가 저녁 공기를 적시고 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고 있던 나는 그날도 마당의 의자에 앉아 멍하니 해 지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운명의 거센 역풍을 맞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가만히 정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시기였다. 운명의 쇠사슬은 나를 꽁꽁 결박하여 겨우 숨만 붙어있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멍하니 앉아 있거나 미친 듯이 몸을 혹사하여 내가 알고 있는 무예 동작 중 가장 어려운 자세로 죽기를 각오하고 버티기를 하는 것이었다. 또는 책을 읽는 것이었는데, 그때 중국의 법륜공 창시자인 이홍지의 책에 빠져있었다. 나의 고통스런 현실을 잊는데는 약간은 신비스러운 내용의 법륜공 책들이 도움이 되었다.

     그날 인동초 향기에 취해 멍하니 앉아 있는데, 탱화 그리는 청파(淸波)선생이 등에 배낭을 맨 웬 꾀죄죄한 사내 한 사람을 데리고 느닷없이 나타났다. 혼자 외롭고 울적하던 차에 청파선생의 갑작스런 방문이 반가웠다. 거의 일년 만에 청파를 만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묻고 주변 사람들의 안부까지 확인하느라 얘기가 길어졌다. 특히 나는 외롭고 울적하던 차에 청파를 만나니 말이 많아졌다. 같이 온 사내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고 청파도 그 사내에 대해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나는 물을 끓여 보이차를 우려내어 두 사람을 대접했다. 우리가 얘기에 빠져있는 동안 사내는 조용히 앉아서 내가 읽다가 탁자에 놓아 둔 법륜공 책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가끔 흠흠 잔기침을 하기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하면서 법륜공 책을 살피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이야기에 빠져 그에게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청파가 그 사내에게 나를 장황하게 소개했다. 그리고 내가 연장자이니 내게 인사를 하라고 그 사내에게 말했다.

     "무무라고 합니다."

     그 사내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무심한 눈길이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나를 보고있는데도 그의 시선은 나를 지나쳐 먼 허공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무무라면?"

     "어루만질 무에 없을 무자입니다."

     그의 호가 특이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어루만질 게 있는가---"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인연은 남지요."

     그도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비로소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약간 길죽한 야윈 얼굴이 검게 그을려 있었고 며칠째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있었다. 머리칼도 덥수룩하게 자라있었는데 머리를 감은 지 한참은 돼 보였다. 초여름인데도 검은 야전잠바 같은 낡은 옷을 걸치고 있었고 손등에는 여기저기 긁힌 자국에 상처 딱지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손톱 밑에는 새까맣게 때가 들어있었다.

     청파 말로는 이 사람이 대금을 연주했다고 했다.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고등학교 음악교사로도 재직했다고 했다. 대금 연주활동도 많이 했고 대학 출강도 했었다고 했다. 결혼도 해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화목하게 잘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출을 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인도로 건너가서 몇 년을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요즘은 주로 지리산에 머문다고 한다. 지리산 주변 마을의 빈집이나 폐가 같은 곳을 잠시 빌리거나 무단으로 들어가서 기거하고 있다고 했다.

     "이 친구, 술 때문에 신세를 망친 사람이야. 한없이 여리고 착한 사람인데 술만 마시면 정신을 못차리지. 이제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버렸어."

     청파의 말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알콜 중독 치료시설에 수용되기도 했었고 노숙자 쉼터에서 생활하기도 했다고 한다. 청파의 고향 후배인 그는 부산에 오면 꼭 청파를 찾아오고 청파의 작업실에서 머문다고 했다.

     "술 마시면 안 되겠네---"

     청파와 술을 한 잔 하고 싶었던 나는 알콜 중독 치료까지 받았다는 사내 때문에 걱정을 했다.

     "나도 포기했어. 몇 번을 타이르고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술만 보면 환장을 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요즘은 차라리 같이 한 잔씩 하는 편이지. 내가 같이 마셔야 폭주도 하지 않고 실수도 하지 않아서 말이야."

     청파의 말에 그는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마침 우리집에는 내가 직접 담은 막걸리가 있었다. 우리집 가양주(家釀酒) 빚는 방법으로 담은 술이었다. 찹쌀과 누룩, 맥아(麥芽), 유자, 참깨, 배 등의 재료로 담는 술인데, 종가집이었던 우리집에서는 제사가 많았고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술 빚는 모습을 봐 왔던 나는 쉽게 흉내를 낼 수 있었다. 혼자 있는 동안 몇 번 그 술을 담아 마셔 봤는데 어머니가 빚었던 술맛과 비슷한 맛을 재현할 수 있었다. 청파가 왔을 무렵 담은 술은, 그때가 초여름이라 유자를 구할 수 없어 대신 유자차를 넣었는데 그런대로 맛과 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술은 약간 달콤하고 깊은 맛이 나면서 향기가 좋다. 막걸리 특유의 시큼한 냄새를 유자향이 막아준다. 그리고 뒤끝이  아주 개운하다. 숙취의 후유증이 거의 없다.

     마당의 탁자에다 술상을 차렸다. 커다란 항아리 가득 내가 담은 술을 내 왔다. 보이차로 안주를 대신하기로 했다. 사실 이 술은 안주가 필요없다. 가끔 나를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도 이 술을 대접하는데 그들도 매우 좋다고 감탄을 했다. 안주를 권하면 오히려 안주 때문에 술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마침 동쪽 수평선 위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다는 은파(銀波)로 가득했다. 막걸리를 마실만한 적당한 잔이 없어 말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자완(茶碗)으로 막걸리 잔을 대신했다. 잔 세 개에 가득 술을 따랐다. 술을 본 사내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서로 덕담을 주고 받으며 술을 마셨다.

     "술맛이 기가 막히군. 시원하면서 깊은 맛이 있어."

     단숨에 잔을 비운 청파가 입술을 핥으며 감탄했다. 사내는 반 쯤 잔을 비우고 술잔을 말없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음,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남은 술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를 향해 절을 했다. 이사람이 왜 이러나 하고 의아해하면서 청파를 바라보았다. 청파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신선들이나 마실 만한 술을 빚으셨습니다. 이런 좋은 술을 맛보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으나 그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해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술이 몇 순배 돌았다. 달빛과 인동초 꽃 향기와 촉촉한 초여름 밤의 공기에 젖어 우리는 꿈속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느끼며 술을 마셨다. 사내는 별로 말이 없었고, 이야기 보따리를 거의 다 풀어 놓은 청파와 나도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말소리가 끊어지는 순간 순간 풀벌레 울음소리가 우리 사이를 파고 들어왔다. 술이 거의 바닥이 날 무렵 문득 사내가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저기 마당에 있는 오죽(烏竹) 한 그루 베어 와도 될까요?"

     그때 우리집 서쪽 울타리는 제법 큰 오죽밭이었다. 그러라고 했더니 청파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 친구, 이제 서서히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는구먼."

     청파는 그가 뭘 할지 다 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사내는 배낭에서 작은 톱을 꺼내더니 굵은 오죽을 한 그루 잘랐다. 잎이 붙어있는 가지를 쳐 내고 뿌리 쪽 부분을 두 뼘 정도 길이로 잘라 내었다. 그리고는 긴 드라이브 같은 도구로 마디 속의 막힌 부분을 뚫었다. 조각도를 꺼내서 몇 개의 작은 구멍을 뚫고 끝 부분 단면을 반원 형태로 파냈다. 그 과정에서 조각도가 미끄러져서 왼손을 다쳤으나 흐르는 피를 입으로 빨아 먹으며 작업에 몰두했다.

     "단소를 만드는군"

     청파가 말했다.

     사내는 사포를 가지고 마무리 작업을 했다. 자른 단면 부위와 구멍을 사포로 문질러 매끈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호주머니에서 때에 절은 수건을 꺼내더니 정성들여 표면을 닦아내었다. 악기가 완성된 것이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자기가 만든 단소를 천천히 입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소리는 거칠었다. 단소 특유의 맑고 청아한 소리가 아니라 바람소리가 많이 섞인 탁하고 거친 소리가 났다. 초여름, 물기를 엄청 머금고 있는 생대나무로 만든 단소가 소리를 내는 것만 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즉흥적인 연주였다. 국악의 가락이 아닌, 약간은 국악같은 느낌도 나고 동요 같기도 한데 흐느끼듯 애절하게 가락이 흘러 나왔다. 나는 숨죽이고 그의 연주에 빠져 들었다. 흐느끼듯 애절한 가락은 어느 새 잔잔하고 평화로운 가락으로 바뀌어 있었고 때로는 폭풍우가 몰아치는듯한 격정으로 바뀌기도 했다.

     연주는 길었다. 30분쯤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그의 연주를 들으며 계속 울었던 것 같다. 눈물이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내 속에 응어리져 있던 것들이 전부 눈물로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을 수 있다니. 천상의 세계에서나 있음직한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연주가 끝났는데도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 여운이 길게 남아 있었고 내가 움직이거나 말을 함으로 해서 그 여운을 깨뜨리는 것이 싫었다. 청파도 말이 없었고 사내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참을 우리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청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동생은 감성이 넘쳐서 큰일이야. 감성이 발동하면 주체를 못하지. 가끔은 감성을 주체 못해 거의 발광하는 지경이 되고 말지. 그것 때문에 가출도 했고 가족도 잃었어. 적당하게 감성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 큰일이야."

     나는 사내에게 술을 한 잔 권했다. 그는 술잔을 받더니, 자네도 한 잔 하게 하면서 자기가 방금 만들어서 연주한 단소를 세우더니 위에서 술을 반 쯤 부어 단소를 술로 적시고 나머지는 자신이 마셨다.

     그 사내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인도에 가서는 뭘 했소"

     "여기 저기 돌아다녔지요. 처음에는 라즈니쉬 아쉬람에서 머물고 있다가, 그곳을 나와서는 주로 북인도와 네팔 등지를 빈둥거리며 다녔습니다. 히말라야 설산(雪山)들이 좋아서 구경하고 다녔지요. 풀밭에 앉아 설산의 봉우리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죠."

     "수행(修行)하러 히말라야로 간 건가요"

     "삶 전체가 수행인데 굳이 따로 뭘 하겠습니까"

     "그래도 머리 깎고 출가도 하고 입산수도(入山修道) 한다고 산중에서 틀고 앉아있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다 지가 좋아서 하는 짓이지요. 할 짓이 그것 밖에 없으니까 그러고 살고 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직장 다니고 장사하면서 살고 있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특별할 거 하나도 없어요. 폼 잡고 생색 내고 앉아있는 거지요. 오히려 더 멀어지는 줄 모르고."

     "한 소식 했다는 사람,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잖아요. 지금도 몇몇 사람은 선지식(禪知識)이니 생불(生佛)이니 하면서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고---"

     "장사 수완이 좋은 사람들이지요.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겁니다. 존재에 대한 이해는 사고력이 아니라 깊은 감수성으로 해야 합니다. 만일에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깨달음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깨달음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관념과 무지를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는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완전하게 이해하게 될 겁니다. 완전히 이해한다면 완전한 침묵뿐입니다."

     "많은 성자들이 침묵만을 지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요. 부처님이나 예수님, 노자나 공자는 많은 가르침을 남기지 않았나요."

     "성자라는 개념이 문제입니다. 성자가 곧 완전한 자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완전한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진화 발전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완전함을 지향하는 수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존재' 라는 존재가 존재하게 됩니다. 모든 존재는 완전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지 완전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처님도 열반하시면서 자신은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노자도 존재의 본질을 이해했기 때문에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노자는 자신의 저서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그는 그날 밤 놀랍고도 현란한 어휘들을 달빛 속에 비누방울처럼 쏟아내었다. 달빛을 받아 그 비누방울들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서야 그들은 돌아갔다. 그들이 가고나서도 한참을 나는 홀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달이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빈 마당의 탁자에는 무무거사가 만든 단소가 놓여있고 막걸리 잔으로 썼던 자완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달빛과 풀벌레 소리만 가득했고 가끔 바람이 지나갔다. 이슬을 머금은 인동초 꽃은 더욱 싱싱하게 피고 있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나의 지인 중에 무무거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안나였다. 무무거사가 나를 찾아오기 수 년 전부터 안나는 무무거사를 알고 있었다.

     안나는 내가 잠시 지리산 청학동에 머물고 있을  때 나를 찾아와, 내가 만든 '풍류수(風流手)' 를 배우고 간 젊은 여성이다. 풍류수는 전통무예인 기천문(氣天門), 양산사찰학춤, 무예도보통지 등에서 기운을 단련하고 체력을 강화할 수 있는 자세와 동작들을 간추려서 만든 수련법이다. 동공(動功)과 정공(靜功)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공은 춤사위처럼 부드러운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공은 운기심공(運氣心功)과 수식관(數息觀)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나는 가톨릭의 수녀였다가 환속한 여성이다. 산청의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산골 마을의 빈 집을 몇 채 구입해서 무의탁 할머니들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교통이 불편한 산골인지라 할머니들이 편찮을 때 바로 치료를 받기가 어려워 안나는 여러가지 민간요법들을 많이 공부해서 알고 있었고 그 방면에 유명하다고 소문 난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내가 청학동에 있을 당시 안나는 청학동에 잠시 와 있던 민약(民藥)의 대가를 찾아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청학동에서 별로 할 일이 없었던 나는 가끔 숲속의 공터에서 풍류수 행공을 하곤 했는데 우연히 안나의 눈에 띄였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내 처소로 젊은 여자가 찾아왔다. 머리를 삭발하고 회색 개량한복을 입고 있어 비구니 스님인 줄 알았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내게 큰절을 했다.

     "우연히 선생님이 수련하시는 모습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춤추는 듯한 모습이 무척 아름답고 신비스러웠습니다. 저도 꼭 좀 선생님이 하시던 수련법을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지요."

     "스님이신가요"

     "머리는 깎았지만 스님은 아닙니다."

     눈동자가 맑고 피부는 어린 아이처럼 고왔다. 수녀였는데 환속하였고 세례명은 안젤리나라고 했다.

   

     그날부터 보름간 안나는 내게서 풍류수를 전수받았다. 어렵고 복잡한 동작들도 쉽게 터득했다. 체력도 좋아 육합단공(六合丹功)의 버티기 도 나와 똑같이 버텨냈다. 몸이 유연했고 중심이 잘 잡혀 있었다. 물 흐르듯, 춤을 추는듯한 안나의 풍류수 행공은 가르친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 때 이후 안나는 나를 스승으로 모셨고, 산청에서 청학동까지 제법 먼 길인데도 불구하고 자주 나를 찾아 왔었다. 지금도 부산에 올 일이 있으면 꼭 나를 찾아오고, 곶감, 밤, 녹차 심지어 송이버섯까지 지리산에서 나는 귀한 것들을 보내주곤 한다.

     청파선생과 무무거사가 다녀간 며칠 뒤 마침 안나가 내게 들렀다. 무무거사의 단소 가락이 아직 가슴 속에 여운으로 남아 있던 참이라 안나에게 무무거사 얘기를 하며 그날의 감동을 다시 한 번 맛보고싶다고 했다.

     "그분, 저도 아는 분 같은데요."

     "안나가 무무를 안다고?"

     "네, 몇 년 전 그분의 토굴에서 하룻밤 자고 온 적도 있는걸요."

     세상 참 좁았다. 무무와 안나가 서로 아는 사이였다니!

     "그때는 제가 차가 없었을 때라, 뒤에 다시 버스를 타고 그분 토굴에 찾아갔었는데 그분이 떠나고 없었어요. 다시 한 번 뵙고싶어 수소문 해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인도로 다시 떠났다는 말을 얼핏 들었던것 같아요."

 

     그날 안나는 고운동에 가려고 진주에서 청학동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고운동에서 민약(民藥)을 조제하고 있는 박선생에게서 약을 구입하러 가는 길이었다. 고운동까지는 버스가 들어가지 않으므로 묵계에서 내려 고운동까지 걸어 갈 참이었다. 6월 중순, 장마가 막 시작되려는 시점이라 공기는 덥고 눅눅했다. 그날따라 청학동 가는 버스는 만원이었다.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다. 빈자리가 없을 것 같아 그냥 서서 가기로 마음먹고 있는데 마침 뒷쪽으로 빈자리가 하나 눈에 띄었다. 창쪽으로는 거의 노숙자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고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두어사람 버스 통로에 서 있었는데 그 사람의 행색이 꺼림칙한지 옆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 안나는 그 자리에 앉았다.

     차가 출발해서 진주 시내를 빠져 나왔을 때 쯤 옆자리의 노숙자가 안나에게 말을 걸었다.

     "스님은 어디서 왔어요?"

     "산청에서 왔어요. 그런데 저 스님 아니예요."

     그는 안나가 스님이 아니라고 한  말에는 관심도 없었다.

     "어디 가는데요?"

     "고운동 갑니다."

     "산청고운이라, 그렇지 우리 모두 외로운 구름들이지. 뜬구름일 뿐이지. 청산에서 와서 흰 구름으로 흩어지는구먼. 그래도 산은 맑으니 다행이지."

     산청군의 산청(山淸)과 고운동의 고운(孤雲)을 조합하여 산청고운(山淸孤雲)이라는 시 한 구절을 만들어내는 솜씨로 봐서 이 사람이 예사 사람이 아닐 것 같다고 안나는 생각했다.

     "아저씨는 어디 가세요?"

     "집에 갑니다."

     "집이 어딘데요?"

     "몰라요. 누가 알겠어요?"

     안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그를 힐끗 쳐다봤는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여기서 끝이었다.

 

     안나가 묵계에서 내리자 그도 따라 내렸다. 그의 목적지도 이곳인가 보다 하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는 안나의 뒤를 계속 따라왔다. 신경이 쓰여 근처의 가게에 들렀는데 가게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라 안나는 생수를 한 병 샀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도 생수 한 병을 권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젔더니 냉장 쇼케이스에 진열되어있는 막걸리를 가리켰다.

     "저걸 주세요."

     안나가 막걸리 한 병을 사서 그에게 건네자 그는 활짝 웃었다. 그가 웃자 잇빨이 다 드러났는데 평생을 양치질 한 번 안 한 사람같았다. 거의 갈색의 이빨을 드러내고 그는 활짝 웃었다.

     가게 바깥의 테이블에 앉아 그는 막걸리를 병째 입에 대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아쉬운지 목을 뒤로 한껏 젖히고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핥아 먹고 있었다.

     "한 병 더 사드릴까요."

     그가 다시 활짝 웃었다. 짙은 갈색의 이빨을 다 드러내면서.

     안나는 막걸리 한 병과 종이컵, 빵 몇개와 오징어포를 사 가지고 나왔다.

     "천천히 드세요."

     이번에는 종이컵에다 막걸리를 따라 마시며 빵을 허겁지겁 먹었다. 배가 무척 고팠던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집이 여기예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차를 내렸어요?"

     "스님 따라가려고"

     안나는 어이가 없었다.

     "갈 데가 없으세요?"

     "악양에 거처가 있는데 오늘은 스님 가는 데 같이 가보고 싶네요."

     장난끼 많고 모험심도 많은 안나는 그 사람과의 동행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묵계에서 고운동까지는 가파른 고개를 꽤 많이 걸어서 넘어가야 한다. 동행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 것도 같았다.

 

     묵계에서 고운동으로 가는 가파른 숲길을 두 사람은 헐떡이며 걸었다. 막걸리 두 병을 마신 사내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자기 얘기를 했다. 호를 무무(撫無)라 했고 인도에 갔던 얘기며 네팔의 히말라야 얘기를 신나게 떠들었다. 안나도 수녀였던 자신의 얘기를 간단하게 했다.

     해발 천미터 정도의 고산이라 초여름인데도 숲속은 서늘했다. 길가에는 늦게 핀 동의나물 꽃들이 초록 바탕에 노란 점을 찍어 놓은 듯 피어 있었고, 인적이 드문 숲길이라 검붉은 산딸기들이 지천으로 익어 있었다. 무무는 산딸기를 한움큼씩 따서 안나에게 권했다. 손톱 밑에 때가 새까맣게 들어있는 손으로 딴 산딸기를 안나는 맛있게 받아 먹었다.

     "인도로 네팔로 지리산으로, 아저씨는 뭐한다고 그렇게 다니세요?"

     안나가 물었다.

     "그냥 다니지. 길따라 그냥 놀러 다니지. 길은 끝이 없어. 한 길이 끝나면 또 다른 길이 나타나지. 세상에서 이보다 재밌는 일은 없을거야. 가시밭길도 있고 사막 길도 있고, 오늘 수녀님이랑 걷는 이 길과 같은 아름답고 행복한 길도 있지요. 멈추고싶어도 멈출 수가 없어요."

     안나에 대한 호칭이 스님에서 수녀님으로 바뀌었다.

     "수녀님은 왜 산으로 들어왔어요?"

     이번에는 무무가 물었다.

     "여자의 몸으로 하느님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제약이 너무 많았어요."

     안나는 10여년 동안의 수도자 생활에서 겪었던 좌절과 고통 때문에 눈물이 나려고 했다.

     "모든 종교는  여자에 대해서 부정적이죠. 이슬람교가 가장 그렇고 기독교도 알고 보면 이슬람교 못지 않지. 이슬람교에서는 여자들이 얼굴을 가족 아닌 다른 남자들에게 보이는 것을 금하고 있어요. 그래서 히잡이니 차도르니 부르카라고 부르는 얼굴가리개를 지금도 하고 다니잖아요. 이슬람교에서는 남자의 신분은 여자보다 높다고 하고, 여자는 남자를 보조하기 위해 창조됐으며 여자는 오직 가족인 남자하고만 대화할 수 있다고 하죠. 기독교에서도 여성 수도자인 수녀들은 머리수건을 반드시 쓰고 생활하게 되어있고 여성 신도들은 성당에서 예배 볼 때 면사포를 쓰게하잖아요. 그게 이슬람 여자들의 차도르와 같은 의미예요. 고린도전서에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비추는 거울이라 했지. 그래서 남자는 얼굴을 베일로 가릴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티모테오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가르칠 수 없고 남자를 지배해서는 안된다고 했지. 여자는 나중에 창조되었고 여자가 속아서 처음 죄를 지었다고 했어요. 부처님도 여자의 출가를 반대했어요. 자신의 이모이자 양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출가를 간청하자 마지못해 허락하면서 정법(正法)의 존속 기간이 오백년 단축되게 됐다고 탄식했죠. 여자는 부처가 될 수 없다, 비구니는 무조건 비구를 공경해야 한다. 이런 정법감소설(正法減少說), 여인불성불설(女人不成佛說), 팔경법(八敬法) 등이 모두 여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에서 발생했지. 여자에 대한 가장 평등한 수행법은 탄트라수행일 것이다. 탄트라는 음양의 조화, 존재의 합일을 추구하기 때문이지. 탄트라수행에서는 남녀의 비중이 똑 같아요. 그래서 히말라야 불교의 불상은 남녀교합상이지."

     "티벳의 불상들을 사진으로 봤는데 아름답긴 했지만 좀 야하던데요."

     "우주의 진리가 그 속에 다 들어있죠. 진리는 높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다 들어와 있어요. 우리는 진리 속에서 살고 있어요. 누가 누구를 낳고, 또 그 자식이 누구를 낳고, 성경은 그렇게 시작하죠. 부처님이 사위성에 들어가 밥을 구걸해 와 공양을 마치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금강경은 이렇게 시작되지. 밥 먹고, 결혼해서 자식 낳고, 경전의 도입부는 진리의 가장 핵심을 드러내고 있어요. 뒤에 나오는 내용은 어쩌면 사족일 수도 있어요. 진리는 항상 보편적이고 객관적이고 항상성이 있어야 하지. 기독교는 동정녀 마리아의 허구성에서 빨리 벗어나야 해요. 그건 보편성, 객관성, 항상성에서 벗어나 있어요. 그렇다면 진리가 아니죠.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생물적인 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두 시간쯤 걸어서 고운동에 도착했다. 안나는 박선생 작업실에 들러 할머니들에게 드릴 죽염과 경옥고를 구입했다. 마침 박선생이 화개에 볼일이 있어, 안나와 무무는 박선생의 차를 얻어 타고 악양까지 오게 되었다. 안나는 하동읍에서 내려 진주로 갈 예정이었으나 무무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가 머무는 토굴을 한 번 보고싶었다. 무무도 같이 가자고 졸라서, 하동에서 간단하게 시장을 봐서 악양까지 오게 되었다. 무무의 토굴은 악양에서도 가장 위쪽 동네인 매계리 골짜기에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의 작은 한옥이었는데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탓으로 마당은 잡초로 덮여있었고 마루는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무무는 때에 절은 수건을 꺼내더니 마루의 먼지를 툭툭 털고 훔쳤다. 그리고는 안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비교적 정갈했다. 벽은 흰종이로 도배를 했고 작은 이불 하나 외에 다른 물건은 없었다.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니 툭 트인 전망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악양의 넓은 들판과 섬진강의 푸른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안나는 왠지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옛날에 여기를 한 번 와본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주변의 산과 물, 그리고 작은 집이 안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 같았다.

     무무는 부엌에 들어가더니 한참 후  쟁반에다 '짜이' 두 잔과 소주 두 병, 하동 시장에서 산 오이 몇개를 얹어 가지고 나왔다. 짜이는 홍차를 진하게 우려내 거기다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은, 인도사람들이 즐겨 먹는 차를 말한다. 무무는 종이컵 두 개에다 소주를 가득 따라 한 잔을 안나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짜이는 뜨겁고 달았다. 술을 별로 즐겨하지 않았지만 그날은 술맛도 달콤했다.

     "술이 달아요."

     안나의 말에 무무가 웃었다. 갈색의 이빨이 드러났다. 안나가 장난처럼 물었다.

     "아저씨는 양치질을 안하세요?"

     "이빨 안 닦은지 10년도 넘었는데..."

     "오늘은 닦으세요."

     "치솔도 치약도 없는데"

     "제 꺼 여벌로 갖고 다니는 거 드릴게요."

     "뽀뽀 할 일도 없는데 이빨은 뭐하러 닦아. 수녀님이 뽀뽀 해준다면 닦을게요."

     안나의 가슴이 콩닥 뛰었다.

     "뽀뽀 해드릴게요. 그런데 아저씨처럼 도 닦는 사람도 여자랑 뽀뽀하고싶으세요?"

     "하고싶지. 수녀님처럼 예쁜 사람을 보면 더 하고싶지."

     "각 종교의 수도자들은 결혼을 못하게 하는 계율이 있잖아요."

     "억지고 미친짓이지. 부처님도 예수님도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인간적이었을게요. 농담도 잘 하고 파안대소하며 제자들의 등도 툭툭 때리며 장난도 쳤을거요. 그 당시 분위기가 초상집처럼 엄숙하지만은 않았을거야. 부처님은 출가 전 결혼을 해서 아들도 있었어요. 예수님도 여자와 성적 교합을 했을거요. 성을 초월해도 육체적인 교감은 할 수 있지. 깊은 성적 교감은 상대와의 완전한 합일을 느끼게 해 주죠. 사회적인 관습이나 자신의 관념에 얽매여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속박하고 있어요. 우리는 지금 자유를 잃었어요. 우리는 전체적인 자기 수정이 필요해요. 계율같은 거 개나 물어가라 해요."

 

     밤이 이슥하도록 둘의 얘기는 이어졌다. 라면을 끓여 저녁을 대신하고 소주 대여섯 병을 비웠다. 무무는 끝내 이빨을 닦지 않았고 안나는 방으로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새벽까지 무무는 마루에서, 석상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 있다가 동이 트자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섬진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악양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무무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처사는 기장 달음산 아래, 용천마을 골짜기에 있는 관음사에서 노스님 한 분을 모시고 살고 있다. 관음사는 가난한 절이다. 스님이 노쇠하고 신도도 적어 시주가 별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처사는 가끔 산을 내려와 공사판을 다니면서 생활비를 벌어와야 했다. 10월 초순의 어느 날, 그날도 기장읍내에 있는 공사 현장에 가기 위해 새벽같이 산을 내려왔다. 일광초등학교 옆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 정류장 의자에 웬 사내가 하나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이처사가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노숙자같은 사람이 누더기같은 포대기를 둘둘 감고 누워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혹시 죽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어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이봐, 이봐"

     큰소리로 불러 봤으나 반응이 없었다. 손을 대서 흔들어 보기가 꺼림찍해서 발로 그 사내를 툭툭 차며 다시 불러봤다.

     "이봐, 이봐"

     그제서야 그 사내는 끙 하고 몸을 움직이더니 머리를 들어 이처사를 올려다 봤다. 그러더니 귀찮다는 듯이 다시 머리 끝까지 포대기를 둘러써버렸다. 그날은 산을 내려올 때부터 어쩐지 일을 하러 가기가 싫었던 터라, 이처사는 이 사내와 어울려 놀고 싶었다. 한 때 노숙자로 전락하여 몇년을 전전하고 다녔던 경험이 있었던 이처사로서는 옛 친구를 만난 듯 했다.

     "이봐, 술 한잔 하러 갈까"

     노숙자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이처사는 그를 일으킬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술이라는 말에 그 사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이처사를 바라봤다.

     "배도 고프고 술도 먹고 싶지? 나랑 같이 가면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지. 따라와."

     사내는 덮고 있던 포대기를 말아 베고있던 배낭에다 쑤셔넣고 이처사를 따라 나섰다. 이처사는 사내를 데리고 일광면사무소 근처까지 걸어갔다. 면사무소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막걸리 두 병과 쥐포 한 봉지를 사서 일광해수욕장으로 갔다. 사내는 말없이 따라왔다.

     해뜨기 직전, 수평선은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래사장에 퍼질러 앉았다. 이처사가 사내에게 막걸리 한 병을 내밀었다. 사내는 합장을 하고 나서 막걸리를 받았다. 이것봐라, 땡초 나부랭이인가? 하고 이처사가 생각하고 있는데 사내는 병에 입을 대고 꿀꺽 꿀꺽 막걸리를 마셔대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야"

     사내가 잠시 숨을 돌릴 때 이처사가 물었다.

     "무무"

     사내는 짧게 대답하고 다시 막걸리 병을 입에 갖다 댔다.

     "스님인가?"

     사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쥐포를 북 찢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추운 가을 아침, 찬 막걸리가 먹기 싫어 이처사는 길가에 있는 자판기에서 뜨거운 커피를 뽑아와서 마셨다. 막걸리 두 병은 사내가 다 마셨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을 받아 주위는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의 날개도 황금빛으로 빛났다. 이처사는 해를 향해 정좌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내게서 배운 운기심공을 시작했다.

     이처사는 나보다 나이가 열살이 더 많다. 나를 처음 찾아왔을 때 그의 나이가 50대 후반이었다. 달음산 관음사에서 노스님을 모신지 일년쯤 됐을 때였다. 그는 부산의 명문고 출신이었다. 대학도 서울의 명문대를 나왔다.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던 해상급유업체를 맡아서 운영하게 되었다. 20년을 넘게 사업을 하면서 돈도 엄청 벌었다. 그런데 그의 나이 50대 중반에 접어들 즈음에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급유선 선원들이 막대한 양의 면세유를 빼돌려 시중에 판매한 것이 들통나 회사 대표인 그가 구속되었다.. 일년 정도 교도소에 수감됐다 나왔다. 가정도 파탄이 났고 알거지가 되었다. 충격 때문에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노숙자가 되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오직 술만 찾았다. 3년여를 그렇게 술에 절어 떠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몰골이 너무 처참했고 이 세상에 자신이 존재할 이유가 없음을 알았다. 젊었을 때 자주 올라갔던 달음산 정상의 바위를 생각했다. 그 바위에 올라 몸을 던질 생각으로 용천골 골짜기를 천천히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용천골 제일 위쪽에는 대여섯 개의 절이 모여 있는 절 동네가 있다. 그곳의 관음사라는 조그만 절 앞을 지나갈 때였다. 처사님 하고 누군가가 불렀다. 고개를 돌려 보니 노스님 한 분이 절 입구에 서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처사님, 잠깐 나 좀 도와주고 가시오."

     노스님의 말에 뭔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져 그는 스님을 따라갔다. 그때가 5월 초순이었는데 스님은 공양간에서 혼자 녹차잎을 가마솥에다 덖고 있었다. 절 앞에는 제법 큰 녹차밭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딴 녹차잎 같았다. 그는 스님이 시키는대로 가마솥에서 덖어 낸 녹차잎을 멍석에 펴고 손으로 비볐다. 흰 면장갑 두 개를 겹쳐 끼었는데도 손이 뜨거웠다. 덖고 비비기를 몇번이고 되풀이 했다. 그러는 동안 한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스님은 금방 만든 녹차를 다기에 넣고 정성스레 차를 우려내더니, 백자 잔에다 따르고 까만 나무쟁반에다 얹더니 그더러 들고 따라오라고 했다. 스님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법당이었다. 법당은 작고 고졸(古拙)한 느낌이었다. 탱화도 퇴색되어 있었고 모셔져 있는 불상도 소박했다. 그래도 법당 안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스님은 가지고 온 녹차를 부처님 전에 올리라고 했다. 그리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라고 했다. 그는 시키는대로 했다.

     그는 스님을 따라 삼배(三拜)를 올렸다. 스님이 목탁을 치며 독경을 시작했다.

     "여시아문일시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如是我聞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스님은 30분 정도에 걸쳐 금강경을 독경했다. 스님의 독경 소리는 따뜻하고 힘이 있었다. 그는 뭔가 자신이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짐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80번도 넘게 봄을 맞이하지만 봄이 올 때마다 새로워. 살아 있다는 것은 큰 복락(福樂)이지."

     법당을 나서면서 노스님이 그에게 한 말이었다. 그날부터 그는 관음사에서 노스님을 시봉하게 되었다. 절에서 그를 부르는 호칭이 이처사이다.

 

     이처사는 노스님에게서 틈틈이 명리학(命理學)을 배웠다. 스님은 자신이 옛날에 공부하던 방식대로 이처사를 가르쳤다. 예컨대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염불하듯이 외우게 하는 것이었다. 순서대로 외우고 꺼꾸로도 외우게 했다. 그렇게 육십갑자를 염불하듯이 자꾸 외우다보면 뭔가 기운같은 것이 생겨, 직관이 개발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통변가(通變歌)라는 것을 매일 읽게 했다. 사언절구(四言節句)로 된 방대한 양이었는데 그걸 매일 소리 내어 읽게 했다. 이처사는 스님이 시키는데로 열심히 공부 했다. 잡다한 절 일을 하는 틈틈이 명리학 공부에 매달렸다. 마음은 차츰 안정 되었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 상가건물 신축 현장에 잡역부로 가끔 일을 하러 온 이처사는, 우리집 앞에 붙어있는 '역의연구소' 간판을 보고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그는 내게서 명리학과 기공(氣功)을 공부하게 되었다.

 

     운기심공의 마지막 단계인, 합장한 손을 머리 위까지 뽑아 올려 두 손을 꽃잎이 벌어지듯이 천천히 벌려 몸을 연꽃 속에 집어넣고 단전앞에 결인(結印)하는 동작을 마쳤는데 느닷없이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끝내면 안되지."

     이처사는 놀라서 사내를 쳐다봤다.

     "그렇게 끝내면 토납(吐納)이 안돼서 명상을 하는데 지장이 생겨요. 마지막으로 손을 뒤로 돌려 되감으면서 몸을 숙여 토납을 하고 결인하세요."

     그러면서 자신이 직접 동작을 해 보였다. 간단한 동작인데도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공부를 많이 한 모양이네"

     "아닙니다. 주워 들은 풍월이죠. 지금 하신 행공은 연유가 어떻게 되는 지는 모르지만 아주 잘 만들어진 공법입니다. 티벳의 스님들도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비슷한 행공을 합니다. 그런데 티벳 스님들이 하는 행공보다 더 체계적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무슨 공부를 하셨소?"

     이처사는 사내에게 강한 호기심 생겼다. 사내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길따라 다니는 공부요. 이 길 저 길, 길만 있으면 다니죠. 꽃 피고 새 우는 길도 다니고, 바람 불고 비 오는 길도 다니지요. 세상의 길도 다니고 몸 속의 길도 다니지요."

     세상의 길은 알겠는데 몸 속의 길이라니, 이처사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겁니다. 화두(話頭)건 위빠사나건 단학(丹學)이건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공부입니다. 모든 진리는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제대로 수행을 한 것입니다. 육체를 변화시켜야 본래면목을 회복할 수 있읍니다. 마음은 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몸이 없으면 마음을 닦을 수 없어요. 그래서 몸을 가졌을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언제 이 몸을 다시 가질 수 있겠습니까. 몸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의식을 몸에다 온전하게 집중할 수만 있으면 공부는 끝나는 것입니다. 몸에 집중하면 마음이 보입니다. 칼 G. 융의 심층심리학 현장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죠. 생생한 체험이 가능하죠. 몸 공부가 되면 이세상의 모든 경전이 몸에서 나왔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몸 공부가 되어 있으면 모든 종교의 경전을 알 수가 있죠. 경전의 해석이 매우 쉬워지죠. 경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정말 살아있는 의미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각 민족의 신화(神話)도 우리 몸 속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신화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몸 속, 우리 마음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실제 상황들입니다. 어떤 판타지 영화보다도 재미있고 생생하죠. 그래서 나는 몸 속 길을 여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떻게 하면 몸에 집중할 수가 있을까요."

     "생명에 집중하면 됩니다. 생명의 상징이 숨입니다. 숨은 생명의 또 다른 말입니다. 목숨을 걸었다, 숨이 끊어졌다 등의 말에서 숨은 생명을 의미하지요. 숨이 생명이기 때문에 숨에다 온전하게 마음을 집중하면 됩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아까 하신 행공법처럼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빨리 움직이면 마음이 온전하게 동작에 실리지 못하므로 최대한 천천히 움직여야 됩니다. 꽃잎이 피어나듯이 천천히---. 마음으로 동작을 이끌어야 됩니다. 마음보다 동작이 앞서서는 안됩니다. 아까 하신 그 정도의 행공은 두 시간 정도에 걸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동작에 집중될수록 동작이 느려집니다."

     알콜중독의 노숙자로만 알았던 사람의 입에서 놀라운 얘기가 쏟아져나왔다.

 

     그날 종일을 이처사는 무무와 같이 지냈다. 두 사람은 아침의 대화 이외는 별로 나눈 말이 없었다. 무무는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사양했다. 아침에 마신 막걸리 두 통이 그의 하루 식사였다. 두 사람은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거나 솔밭 사이를 천천히 거닐거나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무무의 곁에서 이처사는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투명해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자신이 맑아지고 밝아지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투명한 가을 하늘로 날아 올라갈 것만 같았다. 나중에 이처사가 내게 와서 하는 말이, 그에게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향기가 느껴지더라고 했다. 그 그윽한 이향(異香)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가을해는 짧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이처사는 무무에게,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관음사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자 무무는 웃으면서 거절했다.

     "저는 하산했습니다. 더 이상 산에 갈 일은 없을 겁니다. 산의 끝은 바다죠. 산의 시작도 바다죠. 입산(入山)과 입수(入水)는 같습니다. 산에 있으나 바다에 있으나 다를 게 없습니다. 바다는 끝이고 시작이죠. 바다는 우리의 마지막 귀의처입니다. 산이 하나이듯이 바다도 하나입니다. 그러나 바다는 높낮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쉴 곳은 바다입니다. 우리 생명의 원천도 바다죠. 저는 어머니 바다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해 겨울, 동지를 이틀인가 지나서 청파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무거사가 죽었다고 했다. 임랑해수욕장에서 그의 주검이 발견됐다고 했다. 그의 호주머니에서 청파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가 발견되어 경찰에서 청파선생에게로 연락을 했다고 했다. 무무거사는 행려사망자로 분류되어 화장장에서 청파 입회하에 화장되었다. 무무거사의 다비(茶毘)는 그렇게 단출하게 치러졌다.

     청파선생 말로는, 무무거사는 임랑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동쪽을 향해 가부좌한 채 앉은 자세로 죽었다고 했다. 소위 말하는 좌탈(坐脫)을 한 것이다. 동네사람들이 추운 겨울날 이틀을 미동도 않고 사람이 앉아 있자 가까이 가서 확인을 해본 모양이었다.

     며칠 뒤 청파선생이 나를 찾아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참을 놀다가, 일어서면서 조그만 상자를 하나 놓고 갔다. 열어보니 하얀 뼛조각인데 작은 유리 구슬같은 것이 몇 개 박혀 있었다. 무무거사가 영롱한 사리 몇 개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그 상자 앞에 향을 피우고 그가 좋아하던 유자막걸리 한 잔을 올리고 그를 추념(追念)했다. 그리고 집 앞 바닷가에 그 상자를 가지고 나가 바닷물에 띄워 보냈다. 만유(萬有)의 귀의처이며 만상(萬象)의 휴식처인 바다에서 편안하기를 빌었다. 그날 밤, 꿈에서 무무거사를 본 것 같기도 했다. 활짝 웃었는데 이빨이 하얗게 반짝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