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향을 피우고 보이차를 마시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오후, 침향을 피우고 뜨거운 보이차를 마신다. 비오는 일요일이라 방문객은 한 사람도 없고 아내도 외출했다. 혼자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서성거리기도 하다가, 마침 아침에 제자 한 사람이 침향을 선물하고 갔기에 그걸 피우고 보이차를 마신다. 침향은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으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의 원뿔 모양이다. 향로에 놓고 불을 붙이자 가느다란 향연(香煙) 실오라기처럼 하늘거리며 위로 올라간다. 어릴 때 맡아봤던 침향 냄새가 제법 많이 났다.
나는 보이차를 주로 마신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보이차를 마셔 왔다. 지금은 보이차가 매우 비싸지만 80년대는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다. 오히려 전통찻집에 가면 보이차가 싼 축에 속했기 때문에 보이차를 많이 마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마시던 보이차들이 아주 고급이었던 것 같다.
당시는 보이차에 대한 수요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법제한 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수의 매니아들만 보이차를 찾았기 때문에 차의 품질에 대한 의심은 추호도 하지 않을 때였다. 잘 숙성된 좋은 품질의 보이차를 그때 많이 마셨다.
보이차는 중국의 운남성 일대에서 생산된 찻잎으로 만든 발효차를 말한다. 완전 발효차로 흑차(黑茶) 계열에 속한다. 운남성 보이현이 이 차의 집산지라서 보이차라는 이름이 붙었다.
운남성은 아열대 기후라서 대엽종(大葉種)의 차나무가 많다. 이 차나무의 어린 잎들을 채취해서 발효시키는데, 차잎을 뭉쳐서 괴(塊)로 만들어 발효시킨다. 주로 떡(餠) 모양이나 벽돌(塼) 모양으로 만든다. 이렇게 병차(餠茶)나 전차(塼茶)를 만드는 이유는 운송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다. 보이차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곳이 티벳이다. 티벳은 고산지대가 되어 채소를 재배할 수가 없다. 그래서 비타민 섭취를 위해 차를 필수적으로 마셔야 한다. 보이차를 끓여 야크 젖으로 만든 버터와 설탕을 듬뿍 넣고 휘저어 보릿가루와 함께 먹는 것이 티벳 사람들의 주식이다.
티벳 사람들은 보이차가 없으면 영양결핍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고대부터 차의 집산지인 운남성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의 중턱에 위치한 티벳에서 운남까지의 여정은 험난했다. 이 교역로가 차마고도(茶馬高道)이다. 차를 덩어리로 만들어야 한꺼번에 많이 운반할 수 있다. 티벳 사람들은 수십마리의 말을 끌고 운남으로 내려와 말과 차를 바꾸어 싣고 갔다.
운남성의 발효차는 차를 즐기는 중국의 귀족들도 매우 좋아했다. 보이차의 그 오묘하고 깊은 맛에 빠지면 다른 차들은 시시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중국의 귀족들은 보이차를 선호했다. 보이차는 숙성 기간이 길수록 맛이 깊어지기 때문에 북경의 귀족들은 차고(茶庫)를 만들어 고급 보이차들을 사들여 저장했다. 수십년, 백년이 넘게 숙성된 차들이 많았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화되고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홍위병들은 오래된 가문의 사치품들을 모두 꺼내 불태우고 파괴했다. 좋은 보이차들도 이때 대부분 불태워졌다. 그런데 그 당시 뒤로 빼돌린 고급 보이차들이 홍콩과 대만 등지로 반출되었다. 80년대 중반 우리가 즐겨 마시던 보이차는 대부분 이때 홍콩으로 반출된 것들이었다. 사실은 명품 반열에 든 보이차를 그 당시에는 일상적으로 마셨던 것이다. 지금은 고급 보이차의 경우,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좋은 보이차를 마시면 몸이 개운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기감(氣感)이 예민한 사람은 좋은 보이차를 마셨을 때 기운이 활성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단전이 뜨거워지고 등이 후끈거린다. 옛사람들이 좋은 차를 마시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 같다고 표현했는데, 좋은 보이차를 마시면 그런 경험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보이차는 정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마신다.
차는 냉한 성질을 갖고 있다. 법제를 잘못한 차를 계속 마시면 몸이 냉해져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차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약리적인 성분들이 몸에 이롭다고 알려져 있지만, 차가 가지고 있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차를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런데 보이차는 오랫동안 숙성되는 과정에서 독성이 사라지고 약성이 강화된다. 그리고 기운의 측면에서 보면, 몸의 기운을 강하게 활성화 시킨다.
보이차는 숙성되는 과정에서 묘한 향기가 생성된다. 처음 마시는 사람들은 볏짚냄새가 난다고 한다. 오랫동안 보이차를 마시다 보면 좋은 보이차에는 난초 향기, 벌꿀 향기, 과일 향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맛도 아주 부드러워 우유를 한 모금씩 마시는 듯 하다.
명품으로 이름난 보이차가 몇 가지 있는데, 금과공차(金瓜貢茶)는 황실에 공물로 올리던 차로, 중국 전역에서도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중국농업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동경호(同慶號), 복원창호(福元昌號), 홍지원차(紅芝圓茶), 송빙호(宋聘號), 녹인원차(綠印圓茶) 등등이 명품차로 인정받고 있다.
오늘처럼 날씨가 쌀쌀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은 보이차 맛이 더욱 좋다. 나는 제법 좋은 보이차를 몇 덩이 가지고 있다. 마당에 매화는 만발해 있고 마루에 들여 놓은 자란(紫蘭)도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침향의 은은한 향기가 서재에 가득하다.
빗소리와 꽃과 향을 벗삼아 홀로 차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