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장애인
학교 강의 때문에 일주일에 두어 번 좌천과 정관을 거쳐 학교가 있는 웅상읍까지 차를 운전해서 간다. 오전 9 시 30 분 쯤, 좌천에서 정관으로 가는 교차로에 도착하는데, 교통 신호등 근처에 다운증후군으로 보이는 한 소년이 늘 서있는 것을 보곤 한다.
동그란 얼굴에 통통한 볼, 작은 눈, 헤벌린 입술에 살짝 스며있는 미소, 작고 통통한 몸매, 전형적인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모습이다. 가만히 미소 띤 얼굴로 지나가는 차들을 무심히 보고 서 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더워도, 추워도 늘 그자리에 그렇게 가만히 서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기장 바닷가인데, 담 밑에서 파도가 철석인다. 집 주변에는 괭이갈매기가 많이 날아 온다. 대부분의 괭이갈매기는 눈부시게 하얀데, 어느 날 누르스름한 빛갈의 괭이갈매기 한 마리가 가로등 위에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리에 제법 길고 굵은 줄이 걸려 있었다. 바다에서 먹이를 잡아먹다가 다리에 얽힌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갈매기가 가로등 위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갈매기 두어 마리가 날아와 이 갈매기를 보고 마구 짖으며 부리로 위협을 했다. 이 갈매기는 머뭇거리다 다른 가로등으로 날아가 앉았다. 그러자 또 다른 갈매기들이 날아와 위협을 했다. 이 갈매기는 밧줄을 달고 힘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TV에 방영되고 있는 '동물의 세계'에서, 아프리카 초원에 살고 있는 물소 무리와 사자 무리의 생태에 관해 방영한 적이 있다.
사자들은 끊임 없이 물소들의 이동 경로를 좇아가며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려 하고, 물소들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뿔로 위협하고 도망치기도 하였다.
물소들 중 어리거나 걸음이 빠르지 못한 것들이 사자에게 잡히면 물소 무리 중 우두머리 수컷이 이들을 구하러 뛰어나오곤 했다. 이 우두머리는 항상 무리의 뒷쪽에서 사자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협공을 받아, 등 위에 한 마리 뒷다리에 한 마리 사자들이 들어붙어 이빨로 물고 늘어지면 우두머리 수컷은 비명을 지르며 무리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면 두어 마리 수컷들이 뛰어나와 사자들을 위협해서 우두머리를 구한다. 상처를 입은 우두머리는 다시 무리를 보호하기 위해 최전선에 선다. 그러다가 다시 사자들의 공격에 상처를 입고 동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몇번의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우두머리의 몸은 만신창이 되고 힘도 떨어져 헐떡이게 된다. 이 때 한 마리의 수컷이 뛰어나와 우두머리를 공격하여 사자들 쪽으로 밀어낸다. 결국 우두머리는 사자들의 밥이 되고 물소 무리는 당분간의 안전을 얻을 수 있다.
한 집단의 동물 무리에서 장애를 가진 개체가 있으면 그 집단 전체의 에너지가 손상된다. 먹이를 구하거나, 이동을 하거나, 적과 싸움을 할 때 집단을 구성하는 개체 모두가 건강하고, 활기차고, 온전해야 효율이 극대화 된다. 그러나 손상된 개체가 있으면 효율이 떨어진다. 만일 손상된 개체가 있으면 어느 선 까지는 손상을 복구하려고 시도한다. 흔히 동물들의 이타적 행동에 대한 기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무리 전체의 에너지를 복구하려는 한정된 시도이다. 손상된 개체로 인해 무리 전체의 에너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진다 싶으면 가차없이 손상된 개체를 배제한다. 이것이 동물사회의 행동패턴이다.
인간사회에서도 동물사회의 행동패턴이 그대로 적용된다. 장애인에 대한 비하나 구박이 그것이다.
병신 흉내를 내며 우스워하고, 병신춤을 추는 사람이 한 때 유명해진 적도 있었다. 코메디 프로에는 꼭 모자라는 바보 연기가 들어간다. 장애인은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었다.
장님을 보면 재수없다는 말도 있고, '병신 육갑 떠네' '문둥이 콧구멍에 낀 마늘 빼 먹는다' 등 장애인을 비하하는 속담도 많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냉담했다. 그들은 주눅들었고 격리되었고 구박받았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인 배려는 미약했다. 무리 전체의 에너지를 저하시킨다는 동물행동학적인 원리가 인간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그들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것으로 그들을 전체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본능을 표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극빈자로 살아갔다. 그들은 천대 받았고 사회 구성원의 당당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인도의 어느 부족과 네팔 등에서는 장애인을 신성(神聖)시 한다. 그들은 장애인을 떠받들고 공양물을 바친다. 장애인들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다. 매우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 장애인을 숭배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장애인이 된다는 것은 운명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극단적인 불운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조화와 균형으로 규정되어 있는 우주의 원리로 볼 때 신체적인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엄청난 네거티브 상태인 것을 의미한다. 평균적인 삶의 기준에서 볼 때 많이 부족하고 비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보충하고 비어있는 것은 채우려고 하는 것이 우주변화의 원리이다. 현재가 평균 이하면 언젠가는 평균 이상이 반드시 된다. 장애인이 현재 평균 이하의 상태이기 때문에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평균 이상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삶이 일회성이 아닌 연속성이라는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현생에 장애인이라는 극단적인 불운에 처하게 되면 다음의 어느 생에선가는 반드시 불운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 이것이 운명의 이치이고 우주 움직임의 근본 원리이다. 그렇다면 극단적인 불운에 처한 장애인과 좋은 인연을 맺어 둔다면 그가 어느 생에선가 대단한 행운을 누릴 때 역시 좋은 인연의 관계가 되어 보상을 해줄 것이다.
선진국은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아주 잘 되어 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대단하다. 그곳에선 장애인들이 전혀 주눅들지 않는다. 따뜻한 보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 전체가 네거티브 부분에 대한 복원에 주력한다. 한마디로 복 받을 일을 하고 있다. 많은 복을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회다.
북한의 평양에는 장애인이 없다고 한다. 위대한 수령 혹은 위대한 장군이 통치하는 나라에 병신이 나돌아 다녀서는 안된다는 논리라고 한다. 평양에서 추방해 격리 수용된다고 한다.
후진국일수록 장애인에 대한 멸시와 천대가 심하다. 의식 수준이 낮을수록 장애인을 거부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장애인을 잘 대접하는 것이 복 짓는 일이라는 것을.